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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이 있는 시낭송

[스크랩] [다시 읽는 스테디셀러]`사평역에서`

[다시 읽는 스테디셀러]'사평역에서'

◇ 사평역에서/곽재구 지음/146쪽 5000원 창작과 비평사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같은 몇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1981년 한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된 곽재구 시인(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사평역(沙平驛)에서’ 중 일부이다.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역이 아니다. 전라남도의 남평역이라는 작은 역사(驛舍)가 모델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시에서 광주 민주화 항쟁 직후의 암울한 상황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언뜻 보면 서정적인 풍광을 묘사한 낭만시로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질곡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의 고뇌, 화해와 사랑을 위한 염원이 담겨있다. 깊은 밤 간이역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그래도 삶에 대한 끈을 놓지 않는 희망을 그린다.
그의 첫 시집 ‘사평역에서’는 1983년 초판이 나온 뒤 지금까지 소리소문없이 10만부가 넘게 팔렸고, 요즘도 월 200부 이상 주문이 들어올 정도로 꾸준한 반응을 얻고 있다. 창작과 비평사 측은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접근한 그의 시 세계가 독자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며 “간결하면서 솔직담백한 문장이 오랜 생명력을 갖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 시집은 그가 바라본 세상 이야기이다. 1982년 미국의 맨시니와 접전 끝에 하늘로 떠난 권투선수 김득구를 “너는 부서질 줄을 알고 너는 너의 슬픔의 한없는 깊이를 안다”(김득구)고 회상했고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그리움에게)며 피붙이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내비친다. 이밖에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희망을 위하여’ 등 제목만으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시 63편을 수록했다.
20년이나 지난 이 시집을 다시 읽으며 불현듯 기차 여행이 떠나고 싶어진다. 철길 옆으로 펼쳐진 풍경과 이름 모를 역에 내려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

 

▲ 일러스트=권신아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이 시의 등장 인물들은 들뜬 마음으로 혹은 큰 기대감과 설렘으로 고향을 찾는 것이 아니다. 삶에 따라 붙는 고달픔과 고단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안식과 위로를 얻으려 영혼의 쉼터인 고향을 찾는 것이다. 이런 점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 나오는 정씨와 비슷하다. 교도소에서 출감한 뒤 공사판을 떠돌던 정씨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 삼포로 가는 길을 되밟는다. 고향으로의 여정은 그에게 방랑의 삶을 마감하는 길이고, 안식처를 찾아가는 길이다. 따라서 '사평역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삼포가는 길의 정씨는 다같이 고향을 정신의 쉼터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가야산 친구들
글쓴이 : 민이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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