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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볼만한 풍경

강진 영랑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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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영랑생가(康津 永郞生家)
소재지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
지정번호  지방기념물 제89호
규 모  생가일원(4,422m2)
시 대  1906년
지정일  1986-02-07
 
 
  
  
  
  
  
  
  
 
이 집은 한국( 韓國 ) 초창기( 初創期 ) 문단( 文壇 )의 거성( 巨星 ) '모란의 시인( 詩人 )' 영랑의 생가이다.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 金鍾湖 )의 5남매 중 장남( 長男 )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 康津 ) 보통학교( 普通學校 )를 졸업한 후 1917년 휘문의숙( 徽文義熟 )에 진학하였다. 수학( 修學 ) 중 기미( 己未 )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 獨立宣言文 )을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동년( 同年 ) 4월 4일 강진장날 만세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大邱刑務所 )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20년 일본( 日本 )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靑山學院 ) 중학부( 中學部 )에 적( 籍 )을 두었으며 용아( 龍兒 ) 박용철( 朴龍喆 )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1921년 일시귀국하고, 1922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 英文科 )에 입학하였다. 수학중 관동대지진( 關東大地震 )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문학 창작활동을 하였다. 1931년 박용철( 朴龍喆 ), 정지용( 鄭芝溶 ), 이하윤( 異河潤 ), 정인보( 鄭寅普 ) 선생 등과 『시문학( 詩文學 )』 동인( 同人 )으로 시작활동( 詩作活動 )에 참여하여 동년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 등 4행소곡6편( 四行小曲六篇 )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 永郞詩集 )』을 발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인 강진에서 대한청년단( 大韓靑年團 )을 이끌었고 1948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였다. 1945년 이승만( 李承晩 ) 대통령( 大統領 )의 부름을 받아 공보처( 公報處 ) 출판국장( 出版局長 )으로 7개월간 일했다.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은신하였으며 9·28수복작전 때 복부( 腹部 )에 포탄파편을 맞아 동년( 同年 )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 他界 )하였다. 생가의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팔작집으로 지붕은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시멘트기와로 보수하였으며 기단부와 벽체 등은 시멘트로 발라 원형을 상실하고 있다. 좌측 2칸은 전면에 유리창문을 달았으며 우측 3칸은 전면에 마루를 달았으며 3칸 모두가 방이다. 기둥은 사각의 방주이고 상량문에 「광무 10년 병오 4월일립」이라 기록되어 있어 이 집의 건립연대는 1906년임을 알 수 있다.

본채에서 10여m떨어진 좌측에 사랑채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기와는 옛날 것이며 오히려 본채보다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편이다. 특이한 것은 전면와 양칸에 ㄷ자형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측 1칸에는 마루앞에 낮으막한 난간을 설치한 것이다. 창문은 이중창문으로 내창은 밑창으로 되어 있다. 이 사랑채는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보전되어 있는 영랑 생가는 영랑 생가는 그후 몇 차례 전매( 轉賣 )되어 일부 원형이 변경되었으나 1985년 12월에 강진군( 康津郡 )에서 이를 매입하여 원형을 복원하고 이의 유지, 관리를 맡고 있다. 현재 본채와 사랑채 2동만 남아 있고 주변 모란밭을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