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나주를 노래한 안성현님을 ...

방랑시인삿갓 1004 2008. 10. 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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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를 노래한 음악가 안성현님을 찾아...
최 정 웅/ ‘엄마야...’노래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노래비 건립에 맞춰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음악사에서 묻힌 나주출신 ‘엄마야. . .’작곡가 안성현을 재조명한데 이어 이번에는 노래비건립추진위원장인 최정웅씨로부터 노래비를 건립하게 된 배경과 안성현의 자료를 찾기 위해 뛰어다닌 일화 등을 들어 본다.
▶ 편집자주

   
▲ 최정웅 위원장

최정웅: (1940.4.11생)

광주사범학교 졸업
전남/광주에서 40년간 교직생활
광주중흥초등학교 교장 퇴임후 귀향.
남평초등백년사 편찬
현,고향에서 나무꼭두조각 교실 운영

 

인터넷에서 만난 부용산

지난해 보성군의 문화축제에 참가하고자 자료를 수집하던 중 여러 자료 속에서 벌교읍의 시가지에 근접한 ‘부용산 오리길’이라는 산책코스를 실로 우연히 보았다.

‘부용산’은 필자가 20대 교직생활의 초기에 만난 친구(목포 출신)가 수업이 끝난 오후시간이면 구전으로 내려오는 노래라며 풍금을 치면서 곧잘 불러주던 노래였는데 노래가 너무도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그로부터 익힌 나, 또한 열창하였던 노래의 제목이었다.

문득 그 노래가, 그 시절이 생각나기도 해서 더 자세한 ‘부용산’의 내용을 검색하던 중 노래와 함께 나오는 ‘블러그’와 ‘카페’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내가 까무러칠 정도로 놀란 것은 부용산의 작곡가 고향이“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대교리”출신이라는 내용이었다.(내가 태어나 자라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스무 살 앞선 선배이고 내가 입학하기 훨씬 이전에 나의 모교인 광주사범학교 음악선생님으로 근무하신 선생님 중의 한분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날 나는 너무도 가까이 다가오는 내용들 하나하나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더욱 필자를 놀라 게 한 것은‘백과사전’에서 발견한 ‘안성현’은 ‘부용산’에 앞서 유명한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작곡가라는 사실이었다.

‘나주인’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필자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고향‘나주’를 가슴 한복판에 보듬고 살아왔다. 객지에서도 나주출신을 만나게 되면 내 형제처럼 그렇게 반가웠고 줄곧 고향의 이야기 속에 풍덩 빠져버린 일들이 그렇게도 많았었다.

그래서 ‘퇴직’이라는 직장의 짐을 벗는 순간 30여 년 간 도시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가족들을 설득하여 미련 없이 환고향(還故鄕)의 길을 택해 나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향의 생활들은 새삼스레 경이(驚異)스럽기만 했다.

나의 ‘고향’이라는 추억 속에 꽉 차 있는 것은 영산강(지석강)강변의 이야기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 시절이나 지금도 ‘영산강’을 가슴에서 지우고 살수 없는 것은 우리의 핏줄 속에 영산강 강물의 본류가 소리쳐 흐르고 있는‘나주인’이기 때문일까?

그 시절 모든 생활의 터전이 강변이었고 운동장과 놀이터도 강변 모래밭이었고 젊은 날 홀로 조용히 산책하거나 명상에 잠기던 장소도 강변이었다. 노래 연습을 하고 시를 낭송하고 때로는 친구들과 청춘을 노래하며 토론의 시간과 공간을 갖던 곳도 강변이었다.

(맑은 물과 강돌, 물고기, 다슬기, 조개, 하얀 모래언덕, 반들반들한 자갈밭, 제방너머 아지랑이, 강변의 창공을 노래하는 노고지리 등등)

틈만 나면 강변에서 시간을 보내던 학창 시절 시를 읊고 노래하던 문우들과 함께  어떤 고난과 설움 속에서도 가족애를 노래하며 희망을 잃지 말자던 아름다운 강변을 노래한 “엄마야 누나야의 시인 김소월은 왜 나주인이 아닌 평안도 정주 사람이었을까?” 하고 원망도 하였다.

바로 이 시(詩)는 나주의 강변이 아니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고.. ‘엄마야..’는 우리의 것이라고.. 우리들은 모두 다투어 예찬 하였었다. 그런데 이 김소월의 시 ‘엄마야..’에다 처음으로 곡을 달아 혼을 얹어 날려준 분이 나주인이라니. 찾고 싶었다. 그분의 흔적을. 그리고 자취를.


안성현님의 흔적을 찾으러..

안성현님의 흔적들을 찾고자 먼저 나선 곳은 가까운 광주교육대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였다. 당시의 재직하였던 사실들을 확인하고자 하였지만 해방직후(미군정청 시대)의 자료들은 일괄 전산화된 자료들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정리된 서류들이 아니었기에 찾아내느라 시간이 꽤 걸리고 매우 힘들었다. 총장님과 사무처의 담당관 그리고 행정실장의 협조로 직원들과 함께 여러 권의 서류뭉치들을 찾아서 확인해 나갔다.

해방의 공간에서 달필로 씌어진, 아직도 잉크냄새가 나는 것 같은 펜글씨를 보면서 가슴 두근거리며 장부들을 하나하나 열어 나갔다. 창씨 개명한 선생님들의 이름이 지나고 문득 안성현(安聖鉉)이라는 한자 이름 석자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의 문서양식들은 일제의 일본인들이 쓰던 서류양식에다 그대로 인적사항만 기록된 것 들이었다.

다음으로 안성현님의 유족을 찾는 일이었다. 인터넷의 검색을 여러 날 집중한 결과 어느 불로그 속에 깊이 들어있는 ‘안성현’을 쓴 자료를 발견하여 글쓴이를 수소문해 어렵게 연락이 닿아 방문할 수 있었다.

바로 광주의 남도일보사의 김선기 논설실장이었다. 참으로 좋은 분을 만나서 안성현님의 이야기와 취재기사 외의 후일담까지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특히 현재 광주에 거주하고 있는 안성현의 처조카 성경래씨를 소개 받을 수 있어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전남대학교도서관 장서 중에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안내받아 찾아갔지만 책이 현재 남아있지 않아 다시 금호문화재단 도서관을 찾아가 열람하여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화로 약속을 하고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안성현님의 처조카를 만나러 양산지구대 그의 사무실로 갔다. 한 개인이 자료를 찾고 있다는 것을 자초지종 설명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협조를 구하는데 힘들었다. 다행히 그가 작곡집 원본과 안성현님의 결혼사진을 보존하고 있어서 작곡집은 복사하고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로 담아왔다.

처조카인 성경래씨에 의하면 수년전에 나주 군수를 방문하여 이 작곡집을 보여주면서 ‘안성현의 재조명’을 건의하였지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실망하고 있던 중 어떻게 알았는지 김선기 기자가 찾아와 취재했던 관계로 안성현에 대한 기사가 ‘광주타임스’에 실린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2006년 4월에 안성현님이 작고한 사실은 국내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지만 그와 고모의 가족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를 통해 그날 작고한 사실을 안 처 조카는 즉시 그의 고모(안성현님의 부인)에게 이미 작고하였다는 사실을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그의 고모 즉 안성현님의 부인이 큰 충격을 받는 전화 통화 현장에 있게 된 사실이 지금도 매우 가슴이 아프다. 안성현님의 부인은 외아들이 병사하고 부산(현재는 서울 손자가 모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면담할 수 없다고 하여 부산방문은 일단 미루고 많은 이야기만 듣게 된 그날의 일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강변의 노래비는 나주의 문화의 단초(端初)이다..

필자는 안성현님을 다시 우리 곁으로 아니 나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남평초등학교총동문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엄마야누나야 노래연구회’를 구성하고 우리가 할 일들을 의논하여 활동 방향을 정하였다.

활동방향은 빠른 시간 내에 안성현선생의 자료들을 찾는 일, 정리하는 일, 지역에 홍보하는 일, 그리고 나주시에 협조를 구하는 일, 그 밖에 안성현님의 작곡집을 재 발간하는 일, 노래를 보급하는 일 등이었다.하지만 노래연구회 회원들의 구성 형편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새해가 닥치자, 신정훈 나주시장이 연례 일정으로 남평읍을 방문하여 읍민들과 대화시간을 갖게 되는 날이었다. 노래 연구회 회원들은 이때다 싶어 나주가 배출한 천재적인 음악가 안성현님을 재조명하고 그가 태어나 살아왔던 영산강(지석강) 강변에서 김소월의 시를 음송하면서 만들었을 ‘엄마야..’노래비를 작곡의 근원지인 강변에 건립하여 줄 것을 시장과의 대화시간에 건의했다. 이에 시장도 지대한 관심을 표하면서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우리는 힘을 얻어 가일층 홍보와 자료의 보강에 주력하였다.

또한 안성현님이 남평 출신이라는 서류 상의 사실 확인은 박명문 남평읍장의 적극적인 협조로 1936년 함경도 함흥으로 전적한 당시의 제적등본을 찾게 되었고 본적지와 출생지와 당시의 가족사황도 확인하였다.

안성현(安聖鉉):1920. 7.13~2006. 4.25
○본관 : 순흥(順興)안씨
○본적 :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교촌리 119번지
○출생 :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동사리 217번지
○주요작품
<엄마야 누나야><진달래><내 고향><앞날의 꿈><어부의노래><들국화><낙엽><봄바람><비><부용산>


이러한 가운데 소도읍 가꾸기 사업으로 진행 중인 남평읍의 제 사업 중 현재 지석강 친수공간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나주시에서는 ‘엄마야...’ 노래비 건립 관계자 간담회를 개최하여 안성현 선생의 음악세계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 수렴과 노래비 건립 추진방향 설정을 위한 협의를 하였다.

이후 ‘엄마야..’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 운영하여 수차례 협의와 토론을 거쳐 노래비 설립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나주의 문화적 컨텐츠로 우리의 영산강을 ‘엄마야누나야’의 강변으로 설정하도록 건의 하였다.

우리는 보다 뜻 깊은 노래비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전국 노래비 건립 실태를 파악하였다

나주의 오유권 문학비, 장흥대덕 문학공원, 광주문예회관 고정희 시비, 정소파 시비, 함평생태공원 호랑나비 노래비, 유달산 목포의 눈물 노래비, 목포여고 부용산 노래비, 벌교 부용산 노래비, 광주공원 시비 등 이 외에도 인터넷을 통해 전국의 유명 노래비는 모조리 찾아 비교 분석했다. 그런 다음 노래비 건립을 위한 조각가를 선정하는 일에 골몰하였다.

그리고 노래비 모형 시안(4 가지안)을 제작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추진위원회 위원들의 의견을 모아 4가지 시안 중에서 <1안>으로 노래비를 결정했다.

노래비는 작곡가의 악상이 살아 숨 쉬는 영산강의 상류, 사시사철 물이 맑고 경관이 아름다운 지석강의 솔밭과 강변모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건립하기로 하고 현지답사를 십 여 차례 한 끝에 입비장소도 결정하였다.


명품 노래비‘엄마야누나야 강변살자’

‘엄마야...’ 노래비를 심오하고 아름다운 시어(詩語)들로 이야기한 시인 김 종(金 鍾)님이 쓴 글처럼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상’이 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그 이상으로 우리의 노래비도 영산강 강변의 명품으로 새롭게 부활할 것이다.

<생명의 땅 나주>가 자랑하는 웰빙의 강물이 펄펄 넘쳐나는 이곳, 선사 이래의 육수욕장(陸水浴場) 지석강은 유치원 어린이들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대학생들 그리고 남녀노소 모든 세대가 푹 쉬어 갈 공간으로 이제 높이 떠오를 것이다.

 우리는 안성현님의 자료를 보강하고 작곡집의 출판과 ‘엄마야..’ 음악의 CD제작으로 ‘엄마야..’노래가 다시 새롭게 태어날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실로 말로는 다 채우지 못한 동분서주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의 고향 나주에 노래비를 아우르는[문화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 모두 행복한 삶의 터전을 노래할 미래의 나주를 그려보면서 오늘도 지석강 강변으로 나가보련다. 행여 노래비터(址)에 찾아 올 길조(吉鳥), 엄마 새와 남매 새가 날아와 앉아 있을 것만 같아서...   (尾)

 

나주투데이 minjukkr@hanmail.net

출처 : 남평초등학교동문회
글쓴이 : 우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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