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이 있는 시낭송

[스크랩] ♤ 테마포스트 - 사평역에서

방랑시인삿갓 1004 2008. 7. 2. 15:28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 사평역沙平驛의 이해와 감상


이미지는 때로 실재보다 뚜렷합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죠. 
그러므로 기억된 이미지란, 많은 경우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사평역, 곽재구 시인의 시로 임철우의 소설로 기억되는 사평역의 이미지는 너무도 선명합니다. 
시와 소설을 읽은 이들에게 사평역은 간이역의 한 상징으로 남습니다. 

원작을 바탕으로 두 번 만들어져 방영된 TV 문학관도 큰 몫을 했을 것입니다.
(1985년 12월 '사평역'과 1996년 5월 '길 위의 날들') 

그러나 사평역은 없습니다. 흔히 있는 일처럼 승객이 줄어들어 폐쇄된 것도 아니죠. 
애당초 전남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는 기차역이 없었습니다. 시인의 상상력이 사평역을 만들고 
다시 그것이 소설을 낳은 것. 요컨데 사평역은 상상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상은 현실의 소산이고 바로 그 현실의 치열함이 사평역을 오늘까지 살아 있게 만듭니다.
 

☞ 남평역. 


문학작품과 드라마 속 '사평역'의 배경은 전남 나주시 남평읍의 남평역입니다. 
그러므로 남평역을 찾아가는 것은 어쩌면 상상에서 현실을 찾아가는 일, 
아니면 현실에서 상상을 찾는 여정이지요. 남평역장은 역 구내에서 사진을 찍는 문제로 승강이를 하는게 
가장 고역이라고 합니다. 철도청의 사전 허가가 없으면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다는 것입니다. 
광주역에서 통일호 기차로 40분 남짓 걸리는 역, 겨울밤의 남평역은 적막합니다. 
어두운 역사(驛舍) 앞마당에는 낙엽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몰려 다닙니다. 

푸른 어둠 속에 싸여 있는 남평역, 곽재구님의 시 '사평역에서' 에 등장하는 톱밥난로는 없었습니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얼음꽃이 피어도 
톱밥 한줌을 던져줄 녹슨 난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기 어딘가 "쓴 약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 낡은 목도리를 두른 사람들이 
난로 주위에 모여 있을 것만 같은 남평역... 

세월은 흐릅니다. 이 작은 역에도 세월은 흐릅니다. 세월은 바람으로 와서 이 작은 목조 역사(驛舍)를 따라 
늘어선 소나무들에 그림자를 남기고 다음 세월을 기다리며 소리없이 저 드들강을 바라보고 있겠지요. 
해마다 승객이 줄어드니 언젠가 남평역도 없어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남평역은 없어져도 사평역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사평역이 남아 있으면 남평역도 살아있을 것이 아닐런지요?!

 

 

 

출처 : 追憶의 꿈나루터™
글쓴이 : doppelgang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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