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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남평읍행사 포토이야기

나주 남평 지석강 솔밭 유원지에 세워진 '엄마야 누나야'노래비. 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 제공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가 나주 남평 지석강변에 세워졌다. 김소월의 시(詩)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사람은 남평 출신 월북 음악가 안성현(1920∼2006)선생. 가곡 부용산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6ㆍ25 때 월북한 그는 그동안 '월북 음악가'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오는 30일 나주 남평 지석강 솔밭유원지에서 '엄마냐 누나야'노래비 제막식을 갖는다고 26일 밝혔다. '엄마야 누나야'노래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로 승화시킨 안성현 선생의 고향이 남평이기 때문이다.

따스하면서도 서글픈 곡조의 이 노래를 작곡한 안 선생은 1920년 남평읍 동사리에서 태어나 남평초등학교를 졸업(21회)하는 등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지석강변에서 보냈다. 1936년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한 뒤 도쿄 동방음악대 성악부를 졸업한 안 선생은 귀국한 뒤 전남여중(현 전남여고)과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대), 조선대 등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에 재직하던 1948년에는 같은 학교 국어교사였던 박기동씨가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을 기리기 위해 쓴 시 '부용산'에 곡을 붙였다.

목포와 보성 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진 '부용산'은 그해 발발한 여순사건에서 빨치산들에 의해 자주 불려졌고 월북 인사가 작곡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중에 월북했던 안 선생의 소식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6년. 북한의 '문학신문'이 '공훈예술가'칭호를 받은 그가 그해 4월25일 86세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였다.

같은 해 개교 100주년을 맞은 남평초등학교 졸업생 31명은 선배였던 안 선생의 음악적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엄마야 누나야 노래연구회'를 만들어 행방을 추적했다.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월북이후 잊혀져 '남평초등 100년사'에 싣지 못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노래연구회'는 남한에 남아있던 안 선생의 부인 성동월(86) 씨의 조카로부터 1948년 출판된 '안성현 작곡집'을 찾아내기도 했다. '엄마야 누나야'를 시작으로 작곡 순서대로 '앞날의 꿈', '진달래', '내고향', '어부의 노래', '들국화', '낙엽', '봄바람', '비' '부용산'까지 모두 10곡이 수록됐다. 작곡집은 단기 4281년(1948년) 8월17일 안성현 음악 연구소가 발행했고 목포의 '동광사'라는 곳에서 인쇄됐다.

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 최정웅 위원장은 "'엄마야 누나야'가 가장 먼저 실려 있고 '부용산'이 가장 마지막에 실린 점을 감안해 추정해볼 때 '엄마야 누나야'는 해방 직전에 작곡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남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선생이 아름다운 지석강변의 풍경과 추억을 떠올리며 작곡을 하지 않았나 싶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자료들을 토대로 '노래연구회'는 나주시에 "예술가는 예술로 평가받아야 하며 '엄마야 누나야'노래는 지석강변의 아름다움이 반영돼 있는 곡인만큼 노래비라도 세워야 한다"고 요청했다. 일부에서 "월북 음악가의 노래비를 만들거나 기념사업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예술은 예술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우여곡절 끝에 노래가 만들어 진지 70여년 만에 지석강변에 노래비가 세워지게 된 사연이다.

최 위원장은 "부용산 노래비는 있지만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는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면서 "앞으로도 안성현 선생을 재조명하는 작업과 함께 지석강의 문화적 가치를 알릴 수 있는 행사도 개최해 보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